신원정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며 작업하는 유하나는 개념미술과 사회 비판적 성격의 영상과 설치작업을 해 온 작가이다. 개인전 《챔버 Chambers》1에서 그는 자신이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주제인 생명과 생태계에 다각도로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시 제목 ‘챔버(chambers)’는 사전적 정의가 방(室)이나 공간으로, 정치적·건축적·생물학적·공학적으로 독립된 공간을 뜻한다. 필연적으로 ‘경계’의 개념을 수반하는 ‘챔버’의 의미론적 확장성과 (경계) 내부와 외부를 탐색하는 작가의 미학적 실험이 잘 어우러진 《챔버》의 전시작을 살펴보며 미술사적으로 특히 중요한 매체와 모티프의 측면에서 유하나 작업의 특징과 의의를 조명해 본다.
Ⅰ. 매체: 전통과 첨단의 공존
매체 혹은 장르를 기준으로 미술사를 서술한다면 유하나의 작품은 가장 최신 경향을 다루는 챕터에 등장할 것이다. 영상과 이미지가 주가 되는 그의 작품은 미디어, 뉴미디어, 디지털 테크놀로지 등의 용어로 수식되는 동시대 미술의 범주에 포함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푸티지의 조합과 몽타주 기법에 능숙한 유하나의 영상작업은 미디어의 속성과 이미지의 잠재력에 주목하는 최근의 경향과 결을 같이하는데, 특히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제작된 <낙하 The Fall: recording of machine learning Unity>는 첨단 매체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컴퓨터로 구현하는 여러 가지 시스템과 기술을 통칭하는 용어인 인공지능은 21세기 들어 미술계에서 그 파급력이 더욱 증대되었다. 이러한 인공지능의 하위 범주인 머신러닝은 인공지능을 구현하는 방법의 하나로, 기계가 스스로 학습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설계하는 알고리즘을 말한다.
<낙하>는 머신러닝 알고리즘에 의해 학습된 쥐들이 특정한 과제를 수행하는 모습을 조감한다. 구체적으로는 쥐(에이전트) 132마리를 66개의 방(챔버)에 각각 2마리씩 집어넣었는데, 학습된 실험군 쥐는 쿠키를 발견해 다른 쥐에게 주어야 한다. 모든 쥐가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쿠키를 찾으러 이리저리 헤매다가 방 밖으로 나가버리는 개체도 발생한다. 지정된 영역의 이탈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다. 언뜻 허공에 떠있는 원형의 판처럼 보이기도 하는 작은 방을 벗어난 쥐에게는 그저 탈락이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엄청난 높이의 추락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상의 실험동물이 끊임없이 생사의 갈림길에 직면하는 상황은 전시장 한쪽 벽면을 뒤덮다시피 영사되어 일종의 디지털 스펙터클로 펼쳐진다. 쥐를 의미하는 길쭉한 점들이 화면 여기저기서 불규칙한 궤적을 그리며 혼란스레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화면 하단을 향해 질주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광경에서 표출되는 조형성은 인공지능이라는 최첨단 매체의 표피를 쓴 회화사적 전통의 발로라 할 만하다. <낙하>의 화면을 지배하는 요소는 ‘선(線)’, 특히 여러 가지 종류의 곡선이다. 쿠키를 찾아 방안을 배회하는 쥐의 움직임은 성글거나 빽빽한 선의 타래를 만들고, 실패한 개체가 방 밖으로 떨어지며 생겨나는 궤적은 느슨하게 뻗어 나가는 다양한 굵기의 나란한 곡선들을 남긴다. 한 점의 드로잉처럼 순백의 바탕과 검은 선들이 어우러진 흑백 화면에서는 수많은 중간톤의 섬세한 뉘앙스가 풍부한 회화성을 자아낸다.
쥐들의 궤적을 가상의 카메라가 집요하게 좇는 동안, 부감과 앙감 사이를 오가는 시점의 변화는 다양한 시각적 연상을 환기한다. 일견 복잡한 미로처럼 보이기도 하고, 거세게 퍼붓는 폭우 같기도 하며, 울창한 밀림 속 빽빽한 숲을 떠올리게도 한다. 어느 시점에서든 대형 화면에 펼쳐지는 영상은 보는 이에게 압도적인 시각적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실험용 쥐들의 추락이라는 가상의 사건으로 구성된 디지털 이미지는 흑과 백, 선과 여백의 병치라는 비교적 단순한 조형 요소와 원리를 통해 숭고미를 구현한다.
강렬한 원색으로 채워진 거대한 화폭을 통해 20세기의 새로운, 소위 미국적 숭고를 주창했던 바넷 뉴먼(Barnett Newman)은 1948년에 쓴 글 「숭고는 지금이다(The Sublime Is Now)」에서 창작의 근거로써 숭고 개념을 설명한다.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기를 포기한 뉴먼의 대형 색면추상을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가 ‘숭고의 부정적 묘사’라고 칭한 것을 염두에 두고 보면, 동물실험의 서사를 조형적으로 서술하는 <낙하>는 뉴먼이 탈피하려 애썼던 유럽 회화의 역사적 전통에 근접하게 위치하면서도, 불명료한 재현성과 추상성으로 서구 모더니즘 회화의 특질에도 부합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역설을 보여준다. 가상의 실험이 진행되는 방안을 돌아다니는 쥐의 궤적이 만들어내는, 무질서하게 뒤엉킨 선의 타래 이미지가 액션 페인팅이라는 회화사적 계보에 맞닿아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비록 원색의 모노크롬과 상당히 거리가 있는 조형성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뉴먼의 숭고 개념은 <낙하>에 적용될 수 있다. 영상을 보며 만물을 내려다보는 신(神)의 시선과 거의 모든 것을 올려다보는 개구리의 눈높이 사이를 변위하는 시점 덕분에 관객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초월적 시공간의 지금, 여기를 체험하는 주체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또한, 관객의 현존이 작품의 확장을 촉진함으로써(가령 화면 위로 비치는 관객의 그림자는 시각적 효과를 더욱 풍부하게 한다) <낙하>는 디지털 시대에 숭고를 구현한다는 것이 어떤 가능성을 갖는지 암시한다.
Ⅱ. 모티프: 동물 그리고 생태계
이전에도 <찬란한 풀밭 Splendour in the Grass>(2020)과 같은 작품을 통해 동물 복지를 향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출했던 작가는 《챔버》의 신작들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관한, 더욱 심도 있는 논의를 펼친다. 인류의 정주가 시작된 이래, 오랜 시간 인간과 공생해온 쥐는 거의 모든 전시작을 관통하는 주요 모티프이다. <낙하>에서 실험용 쥐는 학습하고, 과제 수행에 성공하거나 실패한다. 이상의 소설 「이상한 가역반응」(1931)에서 제목이 유래한 <임의의반경의원 Arbitrary Radius Circle>에는 한국 전래 ‘쥐둔갑 설화’의 한 대목이 언급되며, 부주의하게 버려진 사람 손톱과 발톱을 주워 먹고 급기야 손발톱의 주인으로 변하는 쥐가 나온다. <벌거벗은 생명 Bare Life>에는 실험동물로 널리 사용되는 희고 검은 생쥐가 등장한다.
서구에서 쥐는 오랫동안 부정적 의미가 덧씌워진 동물로, 성서에서 설치류는 먹어서는 안 되는 부정한 짐승으로 언급된다(레위기 11:29, 이사야서 66:17). 부족한 식량을 두고 인간과 경쟁하며, 질병과 심지어 죽음을 암시하고, 그 존재 자체로 불결한 환경을 연상시키는 쥐는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대적 존재로 여겨져 왔다. 환영받지 못하는 쥐에 관한 부정적 인식은 미술에서도 잘 드러난다. 도토리와 호두 등 견과류가 담긴 그릇 앞 쥐를 그린 게오르크 플레겔(Georg Flegel, 1566-1638)의 정물화2에서 볼 수 있듯 쥐는 식량을 탐하거나 축내는 모습으로 회화사에 등장하여 파괴와 죽음을 상징하고 삶의 덧없음을 환기하는 바니타스 도상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근대에 와서야 서서히 시작된 인식의 변화는 특히 20세기 들어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생활이 풍족해지고 위생적 환경이 보급되면서 쥐의 전통적인 위협은 그 위력을 잃었다. 대중문화와 순수미술은 앞다투어 쥐를 귀엽고 호감 가는 이미지로 그려냈으며(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미키 마우스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보라), 과학과 학문의 발달은 쥐의 긍정적인 특질, 가령 강인한 생명력에 주목했다. 특히 동물실험에 대거 사용되면서 과거 마냥 유해한 존재였던 쥐에게는 인간의 건강과 질병 퇴치에 유용한 동물이라는 긍정적 이미지가 새롭게 생겨났다. 강한 번식력과 짧은 생애주기 때문에 쥐는 특히 실험에 적합한 존재가 되었고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 설치류는 전체 실험동물의 80%가 넘을 정도로 그 비중이 크다.3
쥐로 대변되는 실험동물의 복지에 관한 불편한 사실이 언급되는 <벌거벗은 생명>은 그러한 논의가 동물뿐 아니라 자연환경과 생태계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생태 미술의 범주에서 고찰될 수 있다. 특히 동물 복지 그 자체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쥐와 사람, 동물과 인간의 상호 관계에서 빚어지는, 각각의 환경의 교차가 유발하는 문제점에 더 주목하는 작가의 태도는 인류세 시대의 생태 미술이라는 측면에서 작품이 읽힐 비평적 가능성을 열어둔다. 한편, 명확하게 언술 되지 않는 (사회) 비판성은 느슨한 서사 구조와 함께 작품의 모호함과 의미적 불명료성을 강화하는데, 이러한 측면은 이상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형이상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임의의반경의원>에서도 관찰된다. 현재로서는 다양한 시도가 절묘한 외줄타기처럼 균형을 잘 잡은 모습이지만, 어느 방향으로든 좀 더 명확한 목소리를 낸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오게 될지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비록 가상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는 하나 <낙하> 속 실험용 쥐의 운명적 비극에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실존적 자유가 반성적으로 투영되었다. 오직 눈앞의 것만 보면서 그저 분주하게 움직이는 쥐들의 모습은, 스스로 자유롭다 여기지만 빽빽한 일상의 틀 안에 갇힌 채 매일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현대인의 초상과 겹친다. 쥐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그저 대략적인 형태만 암시하고 움직임을 시각화했는데도 미술사의 ‘메멘토 모리’ 모티프가 효과적으로 구현되었다. <낙하>에서 추락하는 쥐들의 말로는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지만, 인간의 상상력이 그 여백을 무난하게 채운다. 모든 떨어지는 것에는 끝이 있다.
지금까지 《챔버》의 전시작을 매체와 모티프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전시 제목 《챔버》는 안과 밖의 개념을 내포하며 전시에 선보인 여러 작품에서 언급되는 (비)가시적 경계의 여러 유형에 관한 고찰로 이끈다. 실험공간 내부에 있던 쥐들이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실패하는 <낙하>, 직선이 원을 살해하였느냐고 묻는 <임의의반경의원>, 야생동물의 생사와 직결된 내부와 외부의 정의를 다루는 유해조수를 퇴치하는 엽사, 경계를 넘어섬으로써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는 탈북민, 실험실의 안과 밖을 배경으로 실험실 쥐의 고통 정도를 분석하는 딥러닝 시스템 등을 보여주는 <벌거벗은 생명> - 세 작품 모두 안과 밖, 그리고 그 경계에 관한 탐구의 산물이다. 공간적 경계는 또 다른 경계들(가령 <임의의반경의원>이 제기하는,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의 구분에 대한 의문)과 혼종성(전설 속 의인화된 동물과 겹치는, <임의의반경의원> 속 최첨단 과학이 시도하는 다양한 종의 혼성 실험)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확장된다. 개념적으로나 현실에서 인간의 삶과 관련된 여러 유형의 경계를 다루면서 작가의 관심은 경계 그 자체의 정의나 속성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이 특히 날카롭게 향하는 곳은 바로 경계에 균열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문화예술과 과학에서 전통적인 경계가 날로 모호해지는 오늘날, 난민 문제와 같은 정치적 이슈 및 날로 심화하는 부의 양극화와 계층 간 갈등으로 인한 경계 짓기와 차별화하기가 더욱 심해지는 상황에서 경계를 이탈하는 생명에 초점을 맞추는 유하나의 영상작업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1 전시는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으로 탈영역우정국에서 2021년 9월 30일부터 10월 11일까지 개최되었다.
2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품으로, 제작연도는 미상이다. URL: http://www.sammlung.pinakothek.de/de/artwork/Dj4mBWPx5A/georg-flegel/stillleben
3 2019년에 농림축산식품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실험동물 중 설치류의 비중은 86.9%로 어류(6.3%)나 조류(5.1%)를 압도적으로 능가한다. 농림축산식품부, “2019년 실험동물 보호복지 실태조사 결과 보도자료”. URL: https://www.mafra.go.kr/sn3hcv_v2022/skin/doc.html?fn=79F8DC7F-28E5-5F3F-FB4279DF8F80BF3C.hwp&rs=/sn3hcv_v2022/atchmnfl/bbs/202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