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나 개인전 <챔버>

원을 살해하는, 상자 속의 타자 속, 또 다른 타자들의 궤적

- 이진경, 수유너머




1. 벌거벗은 생명, 혹은 타자마저 되지 못한 타자들


레비나스는 진리를 찾으려는 행위, 원하는 대로 대상을 바꾸려는 노동행위, 그리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상의 향유에서 ‘내가 아닌 것’을 파악하여 장악하려는 의도 또는 지향성을 읽어낸다. 세상을 뜻대로 하려는 의지가 표출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지가 통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자신의 생각만 하면 어느새 멀어져서 갈라서게 되는 연애 상대, 자신의 뜻대로 하면 삐뚤어지며 벗어나는 자식들, 또한 모르는 사이 갑작스럽게 나를 덮쳐오는 것, 죽음.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 주목했던 것은 ‘고통 받는 얼굴’을 가진 이웃들이었다. 마음을 준 이웃이었기에, 그들의 고통스런 얼굴은 나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다가가서 그들의 고통과 그 원인을 알고자 하지만, 남들의 고통이란 아무리 알아도 충분히 알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고통 받는 얼굴을 ‘타자’라고 한다.
주체를 알 수 없고, 주체의 의지대로 행하지 않는 타자. 하지만 그것을 향해 다가가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 자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발생한다. 이를 레비나스는 ‘초월’이라 부르며 이 초월이야말로 인간 사회에 ‘윤리’라는 것을 가능케 하는 출발점이자, 철학에서 가장 일차적인 것이라 말한다.타자라는 개념이 주체의 이성이나 정신, 혹은 인간의 노동을 사유의 축으로 삼았던 서양 철학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음은 분명하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연민을 근원적 출발점으로 삼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이 때의 타자란 그 얼굴에 드러난 고통을 알아볼 수 있는 존재로 한정되어 왔다. 우리가 고통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들, 그러나 고통이 없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실험실의 쥐들이나 동물원 우리에 갇힌 동물들이 그러하다.

20세기 초 유럽에서 대중들의 입장료를 받기 위해 동물원을 설립하자 우리에 갇힌 고릴라는 3일만에 죽어버렸다고 한다. 그 후 계속해서 고릴라가 죽어 나가자, 당시의 동물학자들은 야생의 열린 공간에 살던 고릴라가 우리 속에 갇힌 것이 답답하여 스트레스로 죽은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하여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 마치 개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말을 반박하던 데카르트와 같이 - 인간의 심리를 고릴라에게 투영한 발상이라고, 소박한 ‘의인화’라고 비난했다. 한 마리도 아니고 많은 고릴라가 반복해서 죽었다면, 죽음을 일으킨 조건에서 그들이 고통을 느끼지 않았으리라 가정할 수 있을까? 그렇다, 우리와 다른 것의 고통은 죽을 때도, 부서질 때도 감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레비나스의 ‘타자’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은 개나 고양이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에 반박하려 들 것이다. 그들에게 개나 고양이는 가까운 ‘이웃’이기에, ‘고통 받는 얼굴’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맺기로 인해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동물보호법이 만들어진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야생쥐의 고통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고, 그들을 보호하는 법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까? 또는 바퀴벌레라면 어떠한가?
인간에게 얼마나 유해한 물질인지 연구하기 위해 실험쥐에게 그 물질을 투여하는 과학자들 중 일부는 아마도 쥐들의 고통을 아는 듯하다. 죽은 쥐를 처리해야 하는 행위의 부담 때문이었을까? 덕분에 동물실험에 대한 제약과 규제가 생겨나고 있지만, 실험을 간소화 하기 위해 태어날 때부터 암세포를 달고 태어나는 ‘종양생쥐(oncomouse)’를 만들어 특허를 내고, 유전자 조작 모델로 여러가지 질병에 정신병까지 미리 ‘준비된’ 생쥐를 팔아 돈을 버는 회사가 있으며, 과학자들은 이들 없이는 이제 실험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쥐들의 고통에 대하여 고민하는 이들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실험실에서 죽기 위해 태어나는 이러한 생명체는, 생명을 위한 연구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생명과학분야의 반어 내지 역설이라 할 것이다.
유해물질을 투여하지 않는 실험이라면 어떨까? 어떤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동물들의 행동 실험을 통해 인간의 심리와 행동패턴을 이해하겠다는 행동주의 심리학자의 실험실이라면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스키너 상자’라고 알려진 이 작은 실험실 속 쥐들의 얼굴을 보며 그들의 고통을 읽어냈던 이들은 많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 쥐라는 동물은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일종의 ‘기계’아니었을까? 기계의 고통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우스운 것처럼, 기계-동물의 고통을 말하는 것 역시 우스운 일이었을 게다. “아니, 내가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단 말이오?”라고 당시의 과학자들은 비웃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하나의 작품 <벌거벗은 생명>에 인용되는 인공지능은 그 상자 속의 쥐들에게서, 유해한 물질을 투여받는 것이 아닌, 단지 마취 수술을 받는 쥐들의 얼굴에서 고통을 읽어낸다. 인간이 지각하지 못하는 쥐들의 고통을 기계는 감지하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과 비교하였을 때 쥐들과 더 가까운 존재인 걸까? 그럼 기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또한 던져져야 하지 않을까? 조금 뒤에 우리는 이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동물권 운동에 기여한 철학자 피터 싱어는 인종차별주의를 확장하여 종차별주의를 비판한다. 인간을 피부색의 차이로 차별해선 안되듯이, 개나 고양이를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실험실의 쥐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한다 - 동물들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어선 안된다는 것이, 고통의 공리주의가 그의 신념인 듯 하다. 하지만 앞서 나온 질문과 유사한 질문을 던져 보자면: 파리나 바퀴벌레에 대해서는 어떠할까? 동물보호운동가들이 바퀴벌레의 생명과 고통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얘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그것들은 아직 충분히 ‘동물’이 되지 못한 것일까?
식물의 경우는 어떠한가? 피터 싱어는 식물에게 고통을 느끼는 감각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명시적으로 부정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채식의 윤리학이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식물에게는 감각이 없다는 생각이 어리석은 인간의 편견임이 실험실에서 증명되었다. 인간의 눈은 빛을 감지하는 5가지 광수용체를 갖지만, ‘간단하기에’ 실험실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풀인 애기장대는 11개의 광수용체를 갖고 있다. 누가 더 예민한 시각을 가지고 있을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토마토 나무에 기생하는 미국 실새삼은 토마토 냄새가 나는 ‘향수’를 정확하게 찾아 덩굴을 뻗는다. 덩굴식물인 남미의 보퀼라는 자신이 감치고 들어간 나뭇잎의 모양을 정확하게 의태하여 자신의 잎을 만든다. 눈 없이 어떻게 의태 할 수 있는 걸까? 2007년 캐나다 맥마스터 대학 연구진은 서양갯냉이가 자신과 동일한 모계(같은 개체에서 얻어진 씨앗들)에 속한 것과 다른 모계에 속한 것을 식별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식물도 친족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많은 종류의 식물들은 곤충이 잎을 갉아먹으면 그들이 싫어하는 페놀 성분의 가스를 방출하며, 이를 인근의 잎은 물론 옆에 있는 다른 나무의 잎들도 감지하여 동일한 가스를 방출한다. 그렇다면 식물에게 고통의 감각이 없으리라는 생각이야말로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 할 주장 아닐까? 고통이란 원래 생명체가 자신의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진화시킨 감각임을 생각한다면, 정도나 양상의 차이가 있을 뿐, 생명체가 고통의 감각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생명의 본성에 반하는 것은 없다.

고통 받는 얼굴, 즉 고통의 표상을 통해 타자를 정의하는 것은 이처럼 겹겹이 쳐져 있는 장막 뒤의 타자들을 보지 못한다. 그저 인간과 가까운 타자들만을 볼 뿐이다. 인간과 멀리 있는 것들은 그 고통이 지각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타자조차 되지 못하는 것이다. 고통의 표상은 타자마저 타자화한다. 작품 <벌거벗은 생명> 속의 탈북여성이 ‘얼굴 없이’ 실험실의 쥐나 총에 겨누어진 쥐와 나란히 등장하는 것은, 인간의 고통과 유비되지 않고선 감지되지 않는, 얼굴 없는 동물, 얼굴 없는 존재자의 고통을 가시화하기 위함일 것이다. ‘벌거벗은 생명’, 아감벤의 책 <호모 사케르: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인간’(호모 사케르)의 궁지가 단지 인간에게 한정되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함일 것이다. 아감벤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동물과 같은 처지에 인간을 몰아넣은 처사를 비난하면서도 동물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인간의 삶을 뜻하는 비오스(bios)를 동물적 생명/생존을 뜻하는 조에(zoe)로 추락시킨 근대의 생명정치에 대한 비판이 오히려 인간과 동물 생명의 근본적 단절을 전제하면서, 비오스의 천국과 조에의 지옥을 당연한 듯 분할하고 있는 게 아닐까? 유하나의 <벌거벗은 생명>이 아감벤의 정치철학의 유비로 간주되어선 안되며, 차라리 그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벌거벗은 생명 bare life》, 단편, 16’28’’





2. 현미경 밑의 인공과 자연


인간과 자연, 사회와 자연, 문화와 자연, 인공물과 자연물, 기계와 생명. 인간이 만든 세계와 자연적으로 주어진 세계를 대립시키는 자들은 단지 야생의 자연을 예찬하는 루소적 낭만주의자들만은 아니다. 자연에 대한 지배와 정복, 동물적 자연과 이성적 인간, 자연에 대한 이성적 인식의 발전, 주어진 명령에 따라 미리 정해진 것만 반복하는 기계와 창조적인 어떤 비약을 만드는 생명의 대비,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여전히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무위자연’이란 인위적인 것을 떠나 자연 속으로 들어가 사는 것이라는 발상 또한 노자의 사유라기 보다 서구적인 사유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서 사는 것만큼 ‘유위’인 것도 없지 않은가? 바늘과 컴퓨터, 농사와 공장, 통나무집과 콘크리트 빌딩의 이분화 또한 그러하다. 바늘이 손대지 않은 자연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가? 공업과 달리 자연적 생태계를 보호하는 것이 농업이라는 생각도 근거가 없다. 농사란 손으로 짓든, 그것이 유기농이라 한들 생태계에 인위적 변형을 가하여 자신이 원하는 작물만 키우고 나머지는 죽이는 과정이다. 김매기란 약으로 하든 낫으로 하든, 내가 키우려는 작물 이외에는 모두 제거하는 일종의 살해과정 아닌가. 통나무집은 멀쩡한 나무를 잘라 내가 기댈 집의 기둥과 벽을 만드는 것이다. 이 가운데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생명존중의 생태주의가 어디에 있는가?

생명의 소중함을 예찬하는 주장 속에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로 인해 생명 없는 것들에 대한 멸시와 천대가 ‘자연스럽게’ 행해진다는 점이다. 과거 ‘인간의 존엄성’이란 개념이 인간 아닌 것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의 쓰레기통으로 쉽게 밀어냈 듯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생명사상이나 생명중심주의는 인간중심주의에서 확장된 사유라고 볼 수 있다. 이 사유 안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말할 때면, 생명 없는 사물들, 상품으로 만들어진 물건들, 주어진 것만 반복해서 행하는 힘만 좋은 기계들은 언제나 소중한 것을 부각시켜주는 배경으로 타자화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그 타자 - 기계가 무엇인가를 해낸다 싶으면, 대단한 일이라도 난 듯 소란이 일기도 한다. 인공지능이 퀴즈나 바둑에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면 그들이 하지 못하는 게 있음을 집요하게 들추어 내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을 추월한 그들의 능력에 경이로워 하며 ‘이제 기계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아닌가’ 근심하는 것은 정확히 기계를 타자화하는 사유의 한 단면이다.

브루노 라투르가 지적한 바 있듯이, 홉스는 인간들이 만든 ‘사회상태’와 ‘자연상태’를 분리, 대립시켰고, 진공펌프 실험실을 스펙터클의 장으로 만들었던 보일 또한 실험장치를 통해 ‘정화’된 형태로 포착된 자연을 사회의 개념과 분리해냈다. 그러나 사회에 속한 인간이야말로 자연의 일부이고, 실험실 속의 자연이야말로 특정한 사회적 목적 그리고 특정한 대상을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 아닌가. 그렇기에 사회나 문화 바깥의 자연도 없고, 자연과 대비되는 사회, 문화도 없다. 양자가 뒤섞이고 결합된 ‘하이브리드’만이 실존할 뿐이다.
보일이나 현대 과학자의 실험실은 그 바깥,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구별되는 경계를 갖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바깥에서 반복되는 자연현상과 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보일의 진공펌프가 실험실 바깥의 공기와 연결되어 있듯이 거대한 가속기의 양자실험실은 아주 작은 입자가 그리는 선을 따라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의 강도가 클수록 실험실의 영향력은 커지므로, 실험실의 경계는 단지 그걸 둘러싼 물리적 벽에 한정된다고 할 수 없는 다양한 크기를 갖는다. 이상(李箱)이라면, ‘임의의 반경’을 갖는 원을 여기서 발견했을 것이다. 현미경 같은 실험도구를 통해 우리는 알지 못하는 자연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은 우리가 아는 광학 이론과 렌즈 가공기술을 통해서만 보여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실험실 밖에 있으면서 실험실 안에 있게 되고, 실험실의 그들은 그 작은 방 안에 있으면서 그 바깥의 세계 속에 있다. 자연과 실험실, 원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직선은 그렇게 원을 허물고, 안에서 밖으로, 또 밖에서 안으로 오가는 ‘이상한 가역반응’의 통로인 것이다. 이상의 시구를 제목으로 내 건 <임의의반경원>이 다시 그 시구를 인용하며 하는 말은 이를 상기시키려 함일 것이다. “현미경/ 그밑에있어서는인공도자연과다름없이현상되었다.” 현미경 렌즈 아래 있는 것은 자연물이자 인공물이란 점에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작품은 자연과 문화, 자연과 사회, 기계와 인간을 가르는 선을 ‘살해’하는 하나의 직선을 긋고자 한다. 그러나 이렇게 원의 안과 밖을 잇는 직선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접근하는 것만을 상상한다면, 그건 어느새 외부조건이나 다른 장애물에 오염되지 않은, ‘정화된’ 순수 자연의 환상을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자연과 다름없이 현상되는 인공물만큼이나 자연 또한 인공물과 다름없이 현상되는 것임을 잊고 있는 것이다. 이에 작가가 집요하게 문제화하고 있는 ‘스키너 상자’는 좋은 참조점을 제공한다. 좁은 상자 안의 쥐나 원숭이, 혹은 실험실이나 동물원 우리에 갇힌 동물을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 작은 원에 갇힌 동물들을 통해 스키너와 같은 행동주의자들은 원 바깥에 있는 인간의 심리적 본성을 과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동물행동학자들이 지적해 왔듯이 방 안에 갇힌 실험 동물은 보상과 처벌이라는 이항적 자극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동물이라는 이름의 인공물에 지나지 않는다. 실험실 안에서의 행동은 바깥의 열린 공간에서는 거의 하지 않는 유형의 행동임이 누차 보여졌다. 가령 코끼리나 긴팔원숭이가 막대기를 이용하여 높이 매달린 바나나를 따서 먹을 수 있는지를 관찰하는 실험에서, 그들은 ‘도구를 사용할 줄 모르는 동물’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코끼리의 코가 감각기관이자 촉수이기에 코로 도구를 잡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과학자의 무지 때문이었으며, 나무에 매달려 사는 긴팔원숭이에게 땅바닥은 그들의 삶의 공간을 뜻하는 ‘둘레세계Umwelt’(윅스퀼)가 아니었음을 이해하지 못한 인간의 착각 때문이었다. 학습에 대한 보상으로 준 오이를 잘 먹던 원숭이가 동일 행동에 대해 옆방 원숭이에게는 바나나를 주는 것을 목격하자, 받은 오이를 준 사람에게 다시 내던지는 행동 역시 ‘이익’을 원리로 하여 만들어진 자극-행동의 단순성을 벗어남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실의 모델을 이상적으로 구현한 이와 같은 방 안의 실험들은 꽤나 오랫동안 그 ‘과학적’ 형식 덕분에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는 등불이라고 간주되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어느새 실험실 안으로 끌려들어가 실험동물과 한 방 안에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스키너 상자에 대한 작가의 질문은 이렇게 번역해도 좋을 것이다: “실험상자 안에 인간이 앉아 있다면, 자신에게 주어지는 보상과 처벌의 자극에 대해, 그런 자극으로 자신의 본성을 알려는 시도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이 질문을 통해 반대로 상자 속의 쥐를 인간이 있는 상자 밖으로 빼내고자 함일 게다. 쥐를 인간으로 변신시키는 직설적인 장면은 이 질문을 사람들이 놓칠까 싶은 노파심의 표현이 아닐까.
사실 이러한 질문은 동물에 대한 기계론적 관념에 반감을 가진 이라면 어렵지 않게 던지는 질문이다. 하지만 작가가 자연과 인간, 자연과 기계가 다름없이 현상되는 이상(李箱)의 현미경을 통해, 저 임의의 반경의 원을 향해 던지려는 질문은 오히려 이렇게 번역될 수도 있겠다: “인공지능의 실험상자 안에 인간이 앉아 있다면, 자신에게 부과되는 보상과 처벌에 대하여, 또는 그 방식으로 자신을 훈련시키고 구성하려는 시도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기계에 대한 보상과 처벌이란 말이 어색하다면, 인공지능의 ‘강화학습’에 대한 간단한 글을 읽어보길 바란다. 기계학습 분야에서는 프로그래밍된 보상과 처벌 대신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을 직접 입력하여 이를 인공지능이 학습하도록 하는 방식도 여전히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작가가 주목하듯이, 인공지능은 인간이 입력하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실험하고, 인간들이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반응을 낼 때까지 그 실험을 반복하는 상자 속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 스키너 상자 속의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과 다름없이 작동하는 것을 목표로 개발되고 있다고 한다면, 스키너 상자 속의 동물들에게 그러했듯이, 인공지능에게도 당연히 던져졌어야 할 저 질문이 던져지지 않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물음이다. 물론 그것은 결국 상자 속에 갇힌 포로만이 아니라, 상자 밖과 연결된 우리 자신에 대한 물음임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쓰면서 카프카가 던졌던 질문도 이와 유사하다. 하겐벡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는 “일어서기엔 너무 낮고 주저앉기엔 너무 협소한” 우리 안에서 출구를 찾는다. “저는 이전까지는 그렇게도 많은 출구를 갖고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출구를 찾아야 했다. “그것 없이는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자유라는, 숭고한 만큼 인간들을 기만하는 어떤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고, “단지 하나의 출구만을 원했”다고 한다. “그 출구가 하나의 착각일이라도 말입니다.” 그가 택한 것은 어설픈 탈출 같은 것이 아니라 “슬그머니 달아나기”였다. 인간이 하라는 대로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 그렇게 그는 악수를 하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급기야 말을 하게 된다. “반드시 배워야 한다면 배우는 법입니다. 출구를 원한다면, 배우는 법입니다.” 갇힌 자에게서 쉽게 표상되는 권태와 분노, 좌절과 공포, 그 밑에 깔린 공허를 피하긴 어려운 일이다. 원숭이 로트페터가 자기 곁의 침팬지 눈에서 보이는 “조련된 동물의 착란증세”를 애써 보지 않으려 함은, 그것이 자신의 신체를 통과해 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라면, 어디서나 작은 상자 속에 갇혀 사는 우리 인간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그 권태와 분노, 좌절과 공포, 공허를 잊게 해줄,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를 로트페터의 출구 같은 게 아닐까? 비록 그것이 하나의 착각일지라도 말이다.


《임의의반경의원》, 3채널 비디오, 9’13’’




3. 낙하하는 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


수평으로 배열된 수많은 원형 상자들. 그렇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에 스키너 상자와 같은 실험실은 어디를 가도 있다. 원이 편재한다 함은 원의 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원 안에 있는 점과 원 밖에 있는 임의의 점을 연결할 수 있는 한, 그 직선이 원의 경계를 열고 안과 밖을 연결하는 한, 원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그래도 원 안에 갇힌 것과 그 바깥에 있는 것을 동일하다 할 순 없다. 원 안에 갇힌 것에게는 원인과 결과를 대리할 자극과 행동의 두 변수만이 주어져 있고, 함수관계를 확인하는 차이 없는 반복의 단조로움에 포위되어 있지만, 원 바깥의 우리는 그 함수관계 바깥의 많은 변수들에 둘러싸여 있으니까. 우리는 아직 차이가 지워진 고통스런 반복이 아니라 반복마저 차이의 다른 이름이 되는 즐거운 반복의 세계 속에 있는 것이다. 저 차이 없는 반복의 실험상자에서 ‘성공’이란, 닫힌 방 안을 안전하게 맴도는 것이다. 맴돌면서 확고한 함수의 구현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발견의 예찬이 일상의 보상에 더해 포상으로 주어진다 해도, 저 지루한 성공에 사로잡힐 쥐들은 없다. 그들은 맴돌지만 어느새 ‘학습’의 외연을 벗어나며 원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출구? 그건 아닐 것이다. 빠져나가면서 이내 원들이 정연하게 배열된 수평의 세계 아래로, 까마득한 아래로 추락하니까. 아니, 어쩌면 모든 출구는 추락으로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원형의 방마다 쥐들이 빠져나오며 낙하의 궤적을 그린다. 낙하의 궤적이 그저 곧은 직선이 아닌 것은 그것이 단지 중력이라는 하나의 힘에 끌려가는 것은 아님을 뜻하는 것일까? 덕분에 실험실이나 동물원 우리의 쇠창살을 만드는 직선적 ‘추락’과는 다른 구불구불한 ‘낙하’의 선이 되었다. 그래, 떨어지는 것마저 직선이라면 얼마나 끔찍하겠어. 하나의 변수를 확인하는 신체일 때, 그 신체는 아무리 커도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결과치인 점과 연결되는 하나의 점. 그것이 x와 y간 일대일 대응을 모델로 하는 선형적인 함수관계의 요체다. 따라서 원형의 방 안에서 쥐는 아무리 바쁘게 움직여도 하나의 점일 뿐이다. 반면 함수관계에서 벗어나 추락할 때, 추락하는 쥐는 선을 그린다. 아무리 작은 쥐도 선을 그린다. 추락의 선 자체가 삐둘빼둘한 것은 함수관계의 방 안에서 이탈하여 발생하는 ‘낙하’라서 그럴 것이다. 직선을 뜻하는 선형적 관계에서 벗어난 것이니, 작은 이탈에서 다시 작은 이탈로 미시적 이탈을 거듭하는 선이라 그런 것이다. 그렇게 낙하하는 쥐들이 그리는 수직방향의 선들이 나무들처럼 늘어서며 낙하의 숲이 조성된다. 정연한 원들이 만드는 세계 밑에,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출현한다. 1차원의 선형적 관계의 평면적 증식과는 또 다른 3차원의 세계가 그 곳에 있다. 낙하하는 쥐들이 만드는 세계는 3차원의 세계다. 물론 그것은 원형의 실험실마저 자신의 일부로 포함한다. 실험실 이전의 제멋대로의 선이 일차적이라 해도, 실험실이 존재하고 그로부터 이탈하며 낙하하는 것인 한, 실험실의 원 없는 순수 낙하, 순수 이탈의 세계 같은 건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낙하하는 쥐들이 차원 수를 늘려가며 만드는 이 세계를 영상은 저 멀리서 포착한다. 정연한 평면적 세계로. 낙하하는 쥐들의 궤적도 저 멀리서 포착된다. 그러나 영상은 서서히 거리를 좁히며 원들의 세계로 다가온다. 낙하, 아니 이탈의 이유를 보기 위해 원형의 방을 위에서 조감하는 신의 눈으로 접근한다. 그리곤 다시 슬그머니 낙하하는 것들을 따라 내려간다. 떨어지는 자들이 있는 곳에서 본다. 밧줄처럼 늘어선 낙하의 선 저 위로 실험실의 닫힌 원이 보인다. 실험실의 밑바닥이 보인다. 실험실 아래의 바닥-없음이, 떠받치는 근거의 공허가 넓게 보인다. 그 공허를 채우고 있는 낙하의 궤적들이 숲 속의 나무처럼 서 있다. 세상이란 저 공허를 채우며 숲을 만드는 낙하의 궤적들, 이탈의 선들인 것이다. 진정 원의 ‘살해’라고 할만한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직선이 아니라 이 이탈의 선들이 행한 것이다.
 

《낙하》, 단채널 알고리듬 기반 영상, 유니티, 무한재생




서울 문화 재단